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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메모광 - 이하윤 (異河潤) (1906 ~ 1974)

예빌 2021. 2. 22. 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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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메모광 기억하시나요?

김정운님의 에디톨로지를 읽다가 생각난 중학교 교과서에 실려있던 '메모광'이라는 수필이 생각이 난다. 그 시절 나도 메모 매니아가 되겠노라고 노란서류봉투에 열심이 종이 조각에 깨알같이 자잘한 메모를 모아 담았던 기억이 있다.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고 하는데 제대로 꿰지도 못하고 보관이나 관리도 안되었으니 자료로서의 구실을 못 했나보다.

지금은 스마트폰에서 에버노트를 사용하고 1초메모앱을 제대로 활용하고 있으니 꿰지 못한 자료가 아쉽기는 하지만 그만큼 메모나 자료관리에 대한 갈망이 있었다고 볼 수 있죠. 그래서 지금 이렇게라도 중요시하게 되었겠지요. 옛날 을 추억하며 메모광 수필을 읽어보세요.. ^^

 

 

 

 

수필 '메모광' - 이하윤 (異河潤) (1906 ~ 1974)

어느 때부터인지 나는 메모에 집착(執着)하기 시작하여, 오늘에 와서는 잠시라도 이 메모를 버리고는 살 수 없는, 실로 한 메모광(狂)이 되고 말았다.

이러한 버릇이 차차 심해 감에 따라, 나는 내 기억력(記憶力)까지를 의심할 만큼 뇌수(腦髓)의 일부분을 메모지로 가득 찬 포켓으로 만든 듯한 느낌이 든다.

나는 수첩(手帖)도, 일정한 메모 용지(用紙)도 잘 사용하지 않는다.

아무 종이거나 - 원고지도 좋고, 공책의 여백(餘白)도 가릴 바 아니다. - 닥치는 대로 메모가 되어, 안팎으로, 상하 종횡(上下縱橫)으로 쓰고 지워서, 일변 닳고 해지는 동안에 정리를 당하고 마는지라, 만일 수첩을 메모지와 겸용(兼用)한다면, 한 달이 못 가서 잉크 투성이로 변할 것이다.

불을 끄고 자리에 누웠을 때, 흔히 내 머리에 떠오르는 즉흥적(卽興的)인 시문(詩文), 밝은 날에 실천(實踐)하고 싶은 이상안(理想案)의 가지가지, 나는 이런 것들을 망각(忘却)의 세계로 놓치고 싶지 않다.

그러므로 내 머리맡에는 원고지와 연필이 상비(常備)되어 있어, 간단한 것이면 어둠 속에서도 능히 적어 둘 수가 있다.

가령, 수건과 비누를 들고 목욕탕을 나서다가 무슨 생각이 머릿속에 떠오르면, 나는 이것을 잊을까 두려워, 오직 그 생각 하나에 마음이 사로잡히게 되나, 거기서 연상(聯想)의 가지가 돋치는 다른 생각 때문에, 기록(記錄)할 때까지 기억해 두지 않으면 안 될 수효(數爻)가 늘어, 점점 복잡하게 된다든지, 또는 큰길을 건널 때 자동차를 피하다가, 혹은 친구를 만나 인사와 이야기하는 얼마 동안, 깨끗이 그 생각을 잊어버리는 일이 있다.

생각났던 것을 생각하나,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아 내지 못할 때의 괴로움과 안타까움은 거의 나를 미치기 직전에까지 몰아가곤 한다.

그러므로 목욕이나 이발 시간같이, 명상(瞑想)의 시간이 주어지면서도 연필과 종이가 허락되지 않는 때처럼, 나 같은 메모광에게 있어서 부자유(不自由)한 시간은 없는 것이다.

꿈에서 현실(現實)로 넘어서는 동안, 고개 안팎에서 얻은 실로 좋고 아름다운 상(想)을, 나는 머리맡에 놓인 종이에 곧 의뢰(依賴)하건만 - 바쁜 행보 중(行步 中), 혹은 약간의 취중(醉中)에 기록한 메모의 글자나 그 개념(槪念)이 불충분할 때가 간혹 있다.

그런 메모를 들여다보며 그것을 모색(摸索)하는 고통(苦痛)은 여간 한 것이 아니다.

마치, 예의 있는 석상(席上)에서 상대편의 불쾌를 우려하여, 기자풍(記者風)의 괴벽(怪癖)을 발휘하지 못하는 고통과 비견(比肩)할 만도 하다.

그래, 그 분명하지 못한 자신의 필적(筆跡)을 응시 숙려(凝視 熟慮)해 보건만, 결국 신통한 해답을 얻지 못하는 경우가 또한 적지 아니하다.

연상(聯想)의 두절(杜絶)로 인한 무의미한 자획(字劃)이 한동안 내 머릿속을 산란(散亂)하게 해 주었을 따름이요, 그렇다고 별반 큰 변동이 나 자신에게 발생하는 것은 전연 아니다.

아침마다 나는 그 메모를 대략 살펴, 그 날의 행사를 발췌 초록(拔萃 抄錄)해 들고 집을 나서건만, 물론 실행(實行)은 그 절반도 되지 않는다.

기회 있는 대로 정리하고 정리하는 메모, 여기저기 기이(奇異)한 잉크 흔적을 보여 주는 몇 장의 메모일지라도 나는 그냥 봉투(封套) 속에 집어넣고 간수한다.

그것은 고액(高額)의 지폐에 비길 바가 아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한 번도 분실(紛失)한 일이 없었다.

메모뿐이 아니요, 평소에 별로 소유물(所有物)을 잃어버려 본 일이 없는지라, 성냥 한 갑이라도 이유 없이 어디다 놓고 온 때에는, 불쾌한 마음이 한동안 계속되는 괴벽(怪癖)임에도 불구하고, 일대(一大) 사건(事件) - 내게 있어서는 실로 중대한 사건 - 이 발생한 일이 있다.

이미 오래 된 일이지만, 나의 학창(學窓) 시절에 자취(自炊)하는 친구들의 초대를 받아, 저녁을 먹고 밤늦게 집에 돌아와, 책상 위에서 메모를 정리하려고 포켓을 뒤졌으나, 내 노력은 헛것이었다.

이 날 밤, 잠들기 전의 일과(日課)는 상궤(常軌)를 벗어나, 내 마음을 진정(鎭靜)시킬 길이 없었다.

찾고 또 찾고, 생각다 못해 기차로 두 정거장(停車場)이나 가서도 십 분 이상을 걸어야 하는 친구의 집을 그 길로 다시 되짚어 찾아갔던 것이다.

그들은 이미 자리를 펴고 누웠으나, 쓰레기는 밖으로 나가지 않았었다.

변소로 가는 마루에서 내 귀중한 메모 봉투를 발견했을 때의 즐거움이란!

아직도 어렸을 적이라, 환호작약(歡呼雀躍)하여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 자고 가라는 권유(勸誘)도 한 귀로 흘리고, 단걸음에 숙소로 돌아왔다.

물론, 그 날 밤은 평소에 드문 편안(便安)한 잠자리를 가지게 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의 메모광적인 버릇은 나의 정리벽(整理癖)에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서적(書籍)이며, 서신(書信)이며, 사진(寫眞)이며, 신문, 서류 등의 정리벽은 놀랄 만큼 병적(病的)이다.

그래서 나는 한 가지 원고(原稿)를 끝내지 못하고서는, 다른 새로운 일에 착수(着手)하지를 못한다.

독서에 있어서도 또한 다분히 그런 폐단(弊端)이 있는 까닭에, 책상 위에 4, 5종 이상의 서적(書籍)을 벌여 놓은 일이 별로 없으며, 책의 페이지를 펼쳐 놓은 채 외출(外出)하는 일도 전혀 없다. 또, 수집벽(蒐集癖)도 약간 있어, 내 원고를 발표한 신문, 잡지들은 물론 하나도 빠짐없이 스크랩하고, 소용(所用)에 닿을 만한 다른 신문, 잡지도 가위와 송곳을 요한 후, 벽장 속에 쌓아 두는 것이다.

요컨대, 내 메모는 내 물심양면(物心兩面)의 전진(前進)하는 발자취며, 소멸(消滅)해 가는 전 생애의 설계도(設計圖)이다.

여기엔 기록되지 않는 어구(語句)의 종류가 없다 해도 과언(過言)이 아닐 만큼 광범위(廣範圍)한 것이니, 말하자면 내 메모는 나를 위주로 한 보잘 것 없는 인생 생활의 축도(縮圖)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쇠퇴해 가는 기억력을 보좌(補佐)하기 위하여, 나는 뇌수(腦髓)의 분실(分室)을 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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